한국도 역사가 오래된 만큼, 화폐의 역사도 오래되었다. 선사시대에서 지금까지 국내 각지에서 발견된 석기 시대 유물로 유추해 볼 때, 우리나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70만 년 전의 구석기시대부터라고 추정된다. 구석기인들은 수렵과 어로 생활을 하면서 동굴이나 물가에 살았으나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농경법을 익히고 정착 생활을 하였으며 그 전 시대보다 향상된 생산력을 기반으로 교환 거래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유물 중 화폐의 형태를 갖춘 것이 발견되지 않아 물물교환이 지배적이고 무기, 생산 도구, 곡물 등이 물품 화폐로써 소규모로 사용되었다고 짐작될 뿐이다.
고조선 시대는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의 생활을 영위하면서 생활필수품을 물물 교환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직접 화폐를 주조 및 유통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일찍부터 화폐 제도가 발달한 중국으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평안북도 위원과 영변, 평안남도 영원, 전라남도 강진 등에서 당시의 유물로 보이는 명도전이 발견되었다. 명도전을 비롯한 고대 화폐들은 여러 매 씩 끈으로 묶이거나 항아리 등에 담긴 채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어 그 당시 화폐가 결제 수단으로 유통되기보다는 재산 보존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한 시대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농경 사회로서 철제 농기구를 사용함에 따라 농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삼베를 생산하는 수공업도 상당히 발전하였다. 그 결과 잉여 생산물이 발생하고 교환 거래가 그 전보다 활발해짐에 따라 종전의 물물 교환 방식 대신에 상품 화폐를 매개로 한 간접 교환 방식으로 발전할 필요가 있었다. 이때 교환의 매개 수단으로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이 생활필수품인 곡물과 작물이었다. 마한의 경우 B.C.169년에 동전을 처음으로 주조하였고, 동옥저에서도 금은무문전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을 뒷받침할만한 유물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데다 금과 은이 상류 사회에서 장식 또는 가치 저장 수단으로 사용되었고 일반 서민과는 거리가 먼 물품이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금, 은전이 유통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거의 같은 시기인 한사군 시대에 중국 화폐가 유통된 것으로 보아 삼한에서도 어떠한 형태로든 주화와 비슷한 종류의 화폐가 사용되지 않았을까 추측될 뿐이다.
삼국 시대에는 농업과 수공업 등이 발달함에 따라 생산력이 증대되고 대외 무역이 활발해졌으나, 교환의 매개 수단으로는 물품 화폐인 곡물과 직물이 주로 사용되는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곡물 중에서는 쌀과 조, 직물 중에서는 삼베와 비단이 교환 매개 수단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처럼 곡물과 직물이 화폐 기능을 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첫째, 고구려에서는 2세기경에 이미 곡물로 이식업을 영위하는 고리대가 성행하였다. 이는 2세기 말 고국천왕 때 진대법을 실시하였다는 기록으로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서는 669년에 고리대 원곡과 이자를 탕감한 조치가 있었음을 감안할 때 그 이전에 이미 고리대가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둘째, 곡물과 직물을 조세로 징수했다는 사실을 통해 곡물과 직물이 물품화폐로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체로 국가가 조세로 징수하는 물품은 생산이 보편화되어있고 교역의 매개물로서 적합한 물품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백제는 그 해의 풍흉에 따라 차등을 두어 조세로 명주, 쌀 등을 거두어들였고 고구려는 곡물, 명주, 삼베 등을 조세로 받아들였는데 빈부의 격차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고 한다. 셋째, 곡물과 직물이 물품 화폐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는 실제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태종 무열왕 때, 성 안에서 포 1필의 시장 가격이 조 30섬 혹은 50섬이니 백성들이 성대라 하였다고 하며 665년에는 견포 1필의 규격을 조정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국가가 견포의 규격을 조정하였다는 것은 직물이 이미 물품 화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한편 신라 고분에서 높은 수준의 금 세공품이 많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금의 유통이 상당히 활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삼한 시대와 마찬가지로 금과 은은 일반적인 교환 매개 수단이라기보다 상류 계급의 장식용이나 가치 저장 수단, 대외 무역의 지불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주조된 주화는 996년의 철전인데 형태가 둥글고 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는 방공원형으로 꿰미로 묶어 창고에 쌓아 두었다가 이듬해 길일을 택하여 발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성종 때 철전이 주조되기는 하였지만, 민간에서는 철전이 불편하여 교환 매개 수단으로 주로 미, 포를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성종의 뒤를 이은 목종은 처음에는 포화의 사용을 금지하고 주화의 통용을 장려하였으나 주화의 사용에 대한 민간의 원성이 높아지자 결국 1002년 시중 한언공의 상소에 따라 포화금지책을 철회하고 전, 포 겸욕책을 채택하였다. 즉 , 차나 술 또는 음식을 파는 음식점에서는 주화만 사용토록 하고 다른 거래에는 포화를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주화는 점차 유통되지 않고 사라졌으며 결국 곡물이나 포화가 일반적인 교환 매개 수단으로 사용되는 종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주화인 철전이 발행된지 약 100년이 경과한 1097년에 주화 사용에 관한 논의가 재개되었다. 즉 곡물과 포화가 일반적인 교환 매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던 당시에 교환 경제가 점차 활발해진 데다 곡물과 포화 사용에도 여러 가지 폐해가 발생함에 따라 주화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대두된 것이다. 그 후 1101년에 주전도감에서 백성들이 주화 사용의 편리함을 알게 되었으니 이를 종묘에 고할 것을 상주하는 한편 은병을 최초로 발행하였다. 그런데 은병은 그 가치가 너무 커 소액 거래에 사용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이듬해인 1102년에 고주법을 제정하여 동전인 해동통보를 발행하였으며, 경내에 관설 음식점을 설치하여 해동통보로 그 대가를 지불케 하는 등 동전 사용을 적극 권장하였다. 이에 따라 숙종 때 은병과 해동통보가 각각 고액 화폐와 소액 화폐로 상류층에서 널리 통용되었다. 그러나 농민 등 일반 백성들은 여전히 곡물이나 작물 등 물품 화폐를 주로 사용하였다.
숙종 때 은병과 해동통보가 발행되어 이들 화폐가 도시 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유통되었으나 농촌에서는 여전히 곡물이나 직물이 물품 화폐로 사용되었다. 이에 따라 일반 소액 거래에서 화폐의 이용도를 높이고 악화인 은병의 폐단을 차단하기 위해 1287년에 은덩이 형태의 화폐인 쇄은을 화폐로 인정하여 유통시켰다. 은병의 경우 동이 섞인 위조 은병이 나타나면서 화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에 쇄은은 동과 섞어서 제조하는 것을 금하여 품질 저하를 방지하였다. 이에 따라 품질 저하가 심각한 기존 은병도 쇄은으로 칭량하는 관행이 생겼다. 쇄은마저 화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자 1331년에는 소은병을 만들어 유통하면서 앞서 만들어진 은병은 유통 금지시켜 소은병의 사용을 촉진하고자 하였다. 소은병은 은병에 비해 크기는 작으나, 순도를 높였기 때문에 교환 가치는 오히려 50% 정도 상승해 소은병 1개의 가치가 오승포 15필이었다. 이러한 소은병도 시일이 지남에 따라 점차 은병인지 동병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동 함유량이 많아져 품질이 조악해지면서 고려 말에는 화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여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일부 지방에서 조선 초기까지 유통되었던 소은병은 1408년에 유통이 완전히 금지되었다. 1356년에 공민왕은 도평의사사에 화폐 제도의 개선을 논의케 하였다. 당시 쇄은은 크기가 다양하고 품질도 상이하여 교환 매개 수단으로 사용하기가 매우 불편하였고, 오승포는 오랫동안 사용하면 낡고 헐어서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되며 은병은 동병에 가까웠을 정도로 품질이 조악하고 무거워서 소액 거래에는 너무 불편하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숙종 때에 발행되었던 동전은 이미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아 화폐로 유통시키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에 은 1냥의 가치가 포 8필에 해당하므로 이를 기준으로 표인을 한 은전 즉, 표은을 발행, 유통시킴으로써 화폐 제도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은전의 주조는 논의에 그쳤을 뿐 실현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건국을 목전에 둔 1391년에 지폐의 유통을 위한 논의가 있었는데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시 민간에서는 5승포가 주된 화폐 역할을 담당하는 가운데 2~3 승의 추포도 화폐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추포는 내구성이 약하고 옷감으로 사용하기 어려운 데다 물가 등귀를 초래하는 단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둘째, 공민왕 시절부터 화폐와 같은 이권은 국가가 가져야 한다는 사상이 대두되었는데 체제를 정비하면서 이러한 이권 재상론에 입각하여 화폐를 발행하고자 하였다. 국가가 화폐 발행의 이권을 가지면, 재난에 대비하는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국내외 정세 혼란으로 1392년 4월 시중 심덕부 등의 건의에 따라 자섬저화고는 해산되었고 인쇄된 모든 저화로 종이를 만들었으며 인판은 소각되었다.
'경제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융시장의 기본구조 (2) | 2022.08.24 |
---|---|
화폐의 기능 (0) | 2022.08.24 |
화폐의 기능 (0) | 2022.08.18 |
금본위제 폐지 이전의 역사 (0) | 2022.08.17 |
화폐의 기원 (0) | 2022.08.16 |
댓글